'변산' 제법성지

변산 제법성지는 대종사가 5년간 기거하며 교법을 반포한 곳입니다.

교법을 반포한 봉래정사蓬來精舍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으며 국립공원 변산반도의 중앙에 있습니다. 변산반도는 해안 쪽을 외변산, 내륙 쪽 골짜기를 내변산이라고 하는데 변산 제법성지 사적지들은 내변산에 있습니다. 대종사는 혈인기도를 마치고 원기 4년(1919) 10월 변산에 들어가서 교법을 제정하고 교단 초기 인연들 특히 익산 총부(현 중앙총부) 건설의 인연들을 만나면서 원기 9년(1924) 5월까지 기거한 곳입니다.

봉래정사의 변화의 주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종사는 일찍부터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여 원기 4년(1919) 3월에 오창건을 데리고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변산) 월명암에서 10여 일 머문 후 돌아와, 7월 말에는 다시 정산종사를 보내어 미래의 근거를 정하게 하더니 10월에 이르러 몇 해 동안 수양할 계획에 따라 월명암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후 대종사가 월명암에 계신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지자 전주,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 등이 달려와 모시기를 원하는지라 그 해(1919) 12월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옆 몇 간 초당에 거처를 정하게 하고 몇몇 제자와 더불어 간고한 살림을 하면서 심신의 휴양에 주력하였습니다.

원기 5년(1920) 4월에 대종사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니, 인생의 요도 -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 삼강령 팔조목이었습니다. 원기 6년(1921) 7월에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실상초당 위편에 3간 초당의 건축을 착공하여 그 해 9월에 준공하고 이름을 석두암石頭庵이라 하였습니다. 이때에 대종사도 밖으로 승려들과 교제하며 불교 사찰의 모든 법도를 일일이 청취하고 안으로 제자들과 더불어 새 회상의 첫 교서 초안에 분망하였던 것입니다. 원기 8년(1923) 6월에 서중안, 동풍 형제가 와서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모든 사람의 앞길을 널리 열어 주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하며 대종사의 하산을 지성으로 간청하였습니다. 이듬해 4월 29일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어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으로 새 회상을 내외에 공개하였고 원불교의 교화기지를 이리로 정하고 봉래정사에서 이리로 기거를 옮기자 대종사 떠난 봉래정사를 김남천 일가가 남아 1년간 수호했습니다. 이후 원기 10년부터 이춘풍 일가, 이보국 내외, 전종환 등이 차례로 수호 후, 실상동 주민 고진관 일가에게 위탁하여 수호하였습니다. 원기 33년 9월 오창건 발기로 석두암을 중수하였으나 원기 35년(1950) 10월 6.25동란 작전 중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교단의 손이 미치지 못하다가 원기 63년(1978) 10월에는 월명암 주지 정도전 개인사찰 [원광선원] 및 부속 임야를 인수하면서 원기 64년(1979) 4월 원광선원을 하섬수양원 변산 분원으로 발족, 12월 변산 제법성지 사업회를 발족하였습니다.

원기 65년(1980) 7월 봉래정사 석두암 터에 일원대도비를 건립하고 원기 66년(1981) 1월 봉래수양원으로 기관이 승격되어 원기 66년 5월 21일 대산종사 입석 아래 일원대도비 봉고식을 거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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