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종사법문집 제2집(大山宗師法門集 第2輯)

제9부 행사치사

봉불(奉佛)의 의의(意義)-서성로 봉불식 법문

봉불(奉佛)의 의의(意義)-서성로 봉불식 법문

오늘 법당(法堂)에 모신 저 두렷한 법신불상(法身佛相)은 우주만유(宇宙萬有)가 다 가지고 있는 본성(本性)자리요, 우리 각자(各者)가 간직하고 있는 천진불(天眞佛)인 심불(心佛)의 표상(表象)인 것이다.
예로부터 이 자리를 불가(佛家)에서는「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이라 일렀고 유가(儒家)에서는「무극(無極) 또는 태극(太極)」이라고 하였으며 선가(仙家)에서는「도(道) 또는 자연(自然)」이라 일렀고 기독교(基督敎)에서는「하나님」이라 일러 왔던 것이다.
비록 각종각파(各種各派)에서 그 이름은 각각(各各) 달리 불러왔지마는 진리(眞理)의 구경(究竟)을 통(通)하고 보면 둘이 아니요, 오직 하나인 저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의 진리(眞理)에 벗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대종사(大宗師)님께서는 병진(丙辰) 3월 26일 대각(大覺)을 이루시고 일원대도(一圓大道)를 크게 드러내시어 새 시대(時代) 새 종교(宗敎)의 종지(宗旨)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에 우리 교당(敎堂)이나 가정(家庭)에 저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을 봉안(奉安)하는 것은 한낱 형식적(形式的)인 장엄(莊嚴)이나 한때의 의식(儀式)에 그 목적(目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이 두렷한 진리(眞理), 저와 같이 원만(圓滿)한 부처님을 잘 받들어 그대로 믿고 그대로 닮아서 무궁(無窮)한 혜복(慧福)을 갖추어 생불(生佛)이 되고 활불(活佛)이 되는데 그 목적(目的)과 의의(意義)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와 같이 두렷한 진리(眞理)와 원만(圓滿)한 부처님을 믿고 받들어 그대로 닮아가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시불(侍佛)하는 것이다. 우리가 봉불(奉佛)을 하는 것은 교당(敎堂)이나 가정(家庭)에 법신불(法身佛)을 봉안(奉安)하는 것만 아니라 곧 각자각자(各自各自)의 육신교당(肉身敎堂)에 늘 부처님을 모시자는 것이다. 보라! 사람이 현명(賢明)한 부모형제(父母兄弟)나 위대(偉大)한 스승이나 바른 동지(同志)를 가까이 모시고 사는 분과 아무도 모신 바가 없이 제 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사람의 그 언행(言行)과 처사(處事)가 어떠하며 그 심법(心法)과 인격(人格)이 어떠하던가.
그러므로 고금(古今)의 모든 성자(聖者)나 위인달사(偉人達士)는 다 그 마음 속에 진리(眞理)를 모셨고 위대(偉大)한 스승을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경(經)에 이르시기를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석가세존(釋迦世尊)께서도 과거(過去)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低劫)을 통(通)해서 무량천만불소(無量千萬佛所)의 무수(無數)한 부처님을 모시고 한 분도 빠짐없이 공양승사(供養承事)하시는 일에 하루도 헛되이 지내신 바가 없었노라고 하셨다.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존호(尊號)를 받으신 공자(孔子)께서도 항상(恒常) 요순(堯舜)을 조종(祖宗)으로 모시고 문무(文武)를 법(法) 받으시어 주공(周公)을 스스로 모시어 꿈에라도 행여 못 뵈올까 염려(念慮)하셨다고 한다. 또한 문왕(文王) 같은 분은 강태공(姜太公)을 스승으로 모셨고, 근대 위인(近代偉人)이라 일컫는 인도(印度)의 네루수상(首相) 같은 분은 성(聖) 간디를 그 마음에 늘 모시고 살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밖에도 위대(偉大)한 인물(人物)은 다 그 마음에 반드시 모시는 분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留意)할 점(点)은 모시는 대상(對象)과 모시는 생활(生活)에 있어서 아직 진리(眞理)의 전체(全體)를 확실(確實)히 더우잡지 못한 처지(處地)에서는 처음부터 진리(眞理)만 의지(依支)하려면 거리(距離)가 있는 것 같고 또는 막연(漠然)한 느낌도 없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聖賢)의 말씀에도『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시기 전(前)에는 도(道)가 천지(天地)에 있고 성인(聖人)이 세상(世上)에 나신 후(後)에는 도(道)가 그 성인(聖人)에게 있으며 성인(聖人)이 가신 뒤에는 도(道)가 경(經)에 있다.』하여 진리(眞理)와 성인(聖人)을 따로 보지 않으시고 항상(恒常) 그 진리(眞理), 그 성인(聖人)을 함께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제자(佛弟子)는 자나깨나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나닐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법(法) 받고 닮아갈 수 있도록 저 법신불 일원상(法身佛一圓相)의 진리(眞理)와 그 진리(眞理)를 바로 이어 받으신 스승님들을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모시고 살아간다면 저 법신불 일원상((法身佛一圓相)의 진리(眞理)와 내가 둘이 아닐 것이요, 그 스승님과 내가 둘이 아닌 생활(生活)로 일관(一貫)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교단(敎團) 창립(創立) 당시(當時) 내외(內外)의 모든 사정(事情)이 여의(如意)치 못해서 대종사(大宗師)님께서는 한때 봉래산 석두암(蓬來山石頭庵)에 격거(隔居)하신 바가 있었고, 정산종사(鼎山宗師)께서는 월명암(月明庵)에 수삼년간(數三年間) 계신 적이 있었다. 그 동안에 때로는 사나운 눈보라도 휘몰아쳤을 것이요, 모진 비바람도 있었을 것이며, 주위(周圍)의 오해(誤解)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산종사(鼎山宗師)께서는 항상(恒常) 법신불(法身佛)과 대종사(大宗師)님을 따로이 생각지 않으시고 오직 뵙고 싶은 간절(懇切)한 마음과, 모시고 싶은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이 날을 더하여 험산준령(險山峻嶺) 십여리(十餘里)를 하루도 빼지 않으시고 이해(理解)없는 이목(耳目)을 피(避)해 가시면서 밤마다 석두암(石頭庵)에 내왕(來往)하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열반 직전(涅槃直前)에까지도 자주 말씀하시기를 대종사(大宗師)님을 뵙고 모신 이래(以來) 나는 일분일각(一分一刻)도 대종사(大宗師)님을 잊은 적이 없고 계미(癸未) 6월 1일 대종사(大宗師)님의 색신(色身)은 떠나셨지마는 꿈에서도 그 어른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하셨다.
대종사(大宗師)님을 받들고 모신 그 마음 그 정성(精誠)이 쌓이고 뭉쳐서 필경(畢竟)은 대종사(大宗師)님의 마음이 곧 정산종사(鼎山宗師)의 마음이 되셨고, 대종사(大宗師)님의 경륜(經綸)과 심법(心法)이 곧 정산종사(鼎山宗師)의 경륜(經綸)과 심법(心法)이 되었던 것이다. 연등불(燃燈佛)을 비롯하여 무량(無量) 천만불소(千萬佛所)의 무수(無數)한 부처님을 모신 석가세존(釋迦世尊)은 곧 연등불(燃燈佛)에 다름이 없는 부처님이 되시어 후일(後日) 주세불(主世佛)로서 천백억(千百億) 화신불(化身佛)을 나투셨던 것이요. 요순(堯舜)과 문무주공(文武周公)을 모신 공자(孔子)님은 큰 요순 문무 주공(堯舜文武周公)에 다름이 없는 성자(聖者)가 되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바로 잡으시고 후일(後日) 대성지성(大成至聖)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최고(最高)의 존호(尊號)를 받으셨던 것이다.
또한 일원(一圓)의 진리(眞理)를 대각(大覺)하시고 주소일념(晝宵一念) 허공법계(虛空法界)와 우주만유(宇宙萬有)를 다 부처로 모시고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하여 온갖 심혈(心血)을 다하신 우리 대종사(大宗師)님께서는 곧 일원(一圓)의 진리(眞理)와 똑같은 부처님이 되셨고, 만생령(萬生靈)의 구주(求主)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시는 사람, 모시는 생활(生活)이 되어야 하겠다. 시불(侍佛)! 모실 시자, 부처 불자이니,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 아침부터 저녁가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꿈에도 모시고, 낮에도 모시고, 자나깨나 진리(眞理)와 스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고 보면 부처가 곧 나요, 내가 곧 부처가 될 것이며, 내가 곧 그 스승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생불(生佛)이 되는 것이다. 봉불(奉佛)은 곧 시불(侍佛)을 하자는 것이요, 시불(侍佛)은 곧 생불(生佛)이 되자는 것이다. 보라! 글씨 잘 쓰는 명필(名筆)을 모시고 글씨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 명필(名筆)을 닮아서 필경(畢竟)에는 명필(名筆)이 되지 않던가.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을 모시고 또 법(法)있는 스승님을 모시고서 살아가노라면 닮아가게 되고, 닮다 보면 저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과 다름이 없는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이 되며 그 스승님과 다름이 없는 참다운 제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은 잃었던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즉, 자가(自家)의 천진불(天眞佛)을 반환(返還)하고 회복(回復)해서 완전(完全)한 권리(權利), 원만(圓滿)한 능력(能力)을 갖춘분이니, 이 분이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이 되며 바로 활불(活佛)인 것이다. 과거(過去)에는 부처라고 하면 나무나 돌이나 금(金)으로 만들어 절간에 모신 불상(佛像)을 생각했거나, 아니면 삼천년전(三千年前)에 저 인도(印度)에서 탄생(誕生)하시어 별을 보고 대각(大覺)을 이루시었다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만을 부처로 알아왔지마는 이제 그런 시대(時代)는 지나갔다. 동양인(東洋人)이건 서양인(西洋人)이건, 흑인(黑人)이건 백인(白人)이건, 남성(男性)이건 여성(女性)이건, 유식(有識)이건 무식(無識)이건 간에 누구든지 저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을 오득(悟得)하신 분은 다 참부처인 것이다.
한걸음 더 들어가서는 사통오달(四通五達)로 두루두루 다 통(通)하고 보면 온 천지(天地)가 곧 참다운 법계(法界)요, 유형무형(有形無形)이 다 한 부처인 것이다. 생불(生佛)은 산부처님 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밥 먹으면 배부를 줄 알고 안 먹으면 배고픈 줄 알며, 목 마르면 물 마실 줄 알고, 곤(困)하면 잠잘줄 아는 부처님! 더우면 시원하게 할 줄 알고 추우면 다숩게 할 줄 알며, 미운사람 곱게 볼 줄 아는 살아있는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세상(世上)에는 사람사람 이다 생불(生佛)이 되어 집집마다 산 부처님이 살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진리(眞理)와 스승님을 모시고 스스로 생불(生佛)이 되는 동시(同時)에 날로달로 무수(無數)한 생불(生佛)이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기원(祈願)하고 노력(努力)해야 되겠다.
세째는 활불(活佛)이 되자는 것이다. 시불(侍佛)을 하여 생불(生佛)이 되자는 것은 곧 활불(活佛)이 되자는 것이다.
생불(生佛)이 되어 가지고 옷만 입고 밥만 먹고 잠만 자는 부처라면 아무런 보람이 없는 것이다. 생불(生佛)이 되었으면 그 힘으로 걸림없이 일할 수 있는 활불(活佛)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활불(活佛)은 살리는 부처요, 활동(活動)하는 부처님 이시다. 내 가정(家庭)을 살리고 내 이웃을 살리고 내 국가(國家) 내 민족(民族)을 살리며, 전 세계(全世界) 전 인류(全人類)와 시방세계 일체생령(十方世界 一切生靈)을 구원(救援)할 수 있는 활동(活動)하는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보라! 자녀(子女)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부모(父母)들의 생각이 갊아 있는 것이요. 우리 중생(衆生)들의 마음에는 모든 성현(聖賢)들의 은혜(恩惠)가 깃들어 있지 않은가? 왜 그렇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그 부모(父母)가 그 자녀(子女)를 위해서 평생(平生)을 바치셨고 그 부처님 그 성현(聖賢)이 그 중생(衆生)을 위해서 온갖 심혈(心血)을 다하여 활동(活動)하신 그 정신(精神)이 우리의 피와 살과 마음 속에 속속들이 스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세세생생(世世生生) 거래(去來)하시면서 마음의 집이 없어서 부평초(浮平草)같이 떠돌아다니는 중생들에게는 정(定)의 안택(安宅)을 지어 주시는 목수(木手)이시요, 마음의 양식(糧食)을 장만해 주시는 식모(食母)이시며 뿐만 아니라 마음의 옷이 없어서 헐벗고 떨고 다니는 중생(衆生)들에게는 계(戒)의 정의(淨衣)를 마련해 주시는 침모(針母)이시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일러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일체(一切) 중생(衆生)에게 마음의 집, 마음의 양식, 마음의 옷을 마련해 주기로 하면 어찌 일분일각(一分一刻)인들 방심(放心)할 수 있으며 일분일각(一分一刻)인들 허송(虛送)할 수 있겠는가? 오직 정성(精誠)스럽게 모시고 정성(精誠)스럽게 살아가면서 부지런히 일하고 다같이 활동(活動)한다면 우리도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툴 수 있는 활불(活佛)이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든 동지(同志)가 봉불(奉佛)의 참다운 뜻을 확실(確實)히 깨달았다면 진리(眞理)의 광명(光明)을 세계만방(世界萬方)에 비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요, 부처님의 자비(慈悲), 하나님의 사랑은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영겁(永劫)을 통(通)해서 미치지 않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오늘 봉불식(奉佛式)의 의의(意義)가 이 법당(法堂)에 저 활신불상(活身佛相)을 봉안(奉安)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 법당(法堂)에 부처님을 잘 모시는데 있고 부처님을 잘 모시자는 것은 생불(生佛)이 되는 데 있으며 생불(生佛)이 되는 것은 활불(活佛)이 되어 가정(家庭) 사회(社會) 국가(國家) 세계(世界)를 책임(責任)지고 살려내는 데 있는 것이니 다같이 이 뜻을 잘 알아서 실행(實行)할 것을 거듭 강조(强調)하는 바이다.